그리스도를 위한 죽음 - 로도스 섬 전투 (下) 전장의 기사들


9월 21일.
공성전이 근 세 달 째 접어든 이 날을 기점으로 투르크 군의 공격은 달라졌다.
종래에는 낮 동안만 공격을 하고 해가 지면 철수하곤 했지만, 이날부터 공격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투르크 보병들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이전보다 훨씬 격렬해진 대포들이었다. 대포는 쉬지 않고 포화를 토해냈다. 수비군은 그저 성벽 뒤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땅굴을 사용한 지뢰 역시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이럴 때는 정말로 숫자의 우위가 무서워진다. 적의 땅굴 위치를 알아도 그에 대항해 땅굴을 팔 수 없다.
총 사흘에 걸쳐서 계속된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은 약 천 오백 발. 바다에서 바라본 로도스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연기가 솟았다고 회자될 정도로 격렬한 포격이었다.
포격만으로도 성벽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거기에 미처 막지 못한 지뢰가 열둘이나 되었다. 로도스 성채는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리고- 로도스 섬에서 싸우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 격렬한 포격이 멎으면 총공격이 시작될 것이었다.

9월 24일 아침, 마침내 포격이 멎었다.
투르크 군의 진영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격을 알리는 소리, 징과 북과 나팔과 피리가 어우러진 전쟁의 음악이다.
성채 안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사단 총원 소집을 의미하는 종소리이다.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로도스 주민들로 이루어진 자경대원들이 제각각 배치된 장소로 달려갔다.
투르크군의 공격은 그야말로 총공격이라는 이름 그대로였다. 이탈리아, 에스파냐, 영국, 프로방스, 오베르뉴… 육지에 접한 모든 성벽 앞으로 투르크 군이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바다 쪽 방위를 맡고 있던 카스티야와 일-드-프랑스 분대 소속 기사들 역시 성벽으로 증원되었다.
술탄 슐레이만 대제가 직접 최전선에 나와 전황을 지켜보는 앞에서, 투르크 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수만의 병력이 빽빽이 들어차서 성벽으로 돌격해온다. 기사단 측의 사격이 개시되자 군데군데 투르크 병사들이 쓰러진다. 하지만, 죽은 병사의 자리는 곧 그 뒷사람에 의해 메워졌다.
기사단은 화포와 투사무기, 그리고 기사단의 독특한 무기인 화염방사기를 사용해 성벽에 달라붙는 적병을 해치워나갔다. 종래에는 비잔틴 해군이 사용하던 이 위협적인 무기 “그리스의 불”의 기술은 기사단에 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투르크군은 그 숫자로 수비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결국 투르크 군은 에스파냐 성채의 흉장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뒤이어 영국 성채와 이탈리아 성채도 투르크 병사들의 등정을 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성벽 위에 오른다고 끝은 아니다. 이번에는 격렬한 백병전이 기다리고 있다. 피로 피를 씻는 처참한 전투가 너비 10m 정도의 좁은 성벽 위에서 벌어졌다.


급기야 에스파냐 성채 위에 투르크 군의 깃발이 올라갔다. 이 소식을 들은 기사단장 릴라당(L'Isle-Adam)은 근위기사들을 대동하고 직접 에스파냐 성채로 달려갔다. 기사단장이 직접 나섰다는 소식이 기사단의 병사들에게 전해지자, 한 풀 꺾였던 사기가 다시 치솟았다.
비록 나이 들었다고는 해도 릴라당 역시 일세를 풍미하던 기사이다. 뒤에서 몸을 사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기사들, 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최전방에서 직접 검을 휘두르며 지휘했다.
한편, 투르크군 역시 영국 성채와 에스파냐 성채 사이가 무너져가고 있다고 판단했는지, 승부수를 띄웠다. 제국 대재상이자 술탄 슐레이만의 처남이기도 한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 하에 1만의 투르크 병사와 1만 5천의 예니체리 군단이 이곳에 투입되었다.
이 공격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할 것이었다. 양쪽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지역보다, 다른 어떤 때보다 격렬한 싸움이 두 군대 사이에 오갔다.
용맹하고 광신적이기로 유명한 예니체리 군단이 모두 이곳에 투입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은 천천히 투르크 군을 에스파냐 성채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곳은 투르크 군의 깃발이 나부끼는 곳이다. 당시 깃발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깃발이 여전히 에스파냐 성벽 위에서 휘날린다는 것은, 여전히 투르크 군이 이 성벽 위를 점령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깃발을 어떻게든 지키려는 투르크 군과 기사단장이 직접 이끄는 기사들 사이에 격렬한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투르크 군의 깃발은 기사단장 릴라당의 손에 의해 성벽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런 격렬한 백병전이 성벽 위에서 벌어지는 와중에도 성벽 군데군데 솟은 높은 탑과 성채들에 배속된 기사단의 저격수들은 그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의 조잡한 총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맞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 적군의 숫자가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아서야, 겨누고 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성 조르쥬 성채에 배치되었던 프랑스 기사, 프랑시스 포르노비는 그날 하루의 전투 동안 500명이 넘는 투르크 군을 쏘아 죽였다.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해질녘이 되자, 슐레이만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투르크 군은 1만여 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기사단 측은 기사 2백여 명을 비롯해 4천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슐레이만은 격노했다. 어째서 성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인가!
특히 한 번은 빼앗았다가 다시 빼앗긴 에스파냐 성채에 대한 미련이 컸을 것이다.
슐레이만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무스타파 파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만은 면하게 해 줄 것을 간청하던 쿠아짐 파샤 역시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급 지휘관들이 너도나도 자비를 간청하기 시작했다. 쿠아짐 파샤도 무스타파 파샤도 명망 높은 대신들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 그들을 처형하는 것은 군대 전체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을 받자 슐레이만은 사형명령은 취소했다. 하지만, 무스타파 파샤는 재상의 직위를 내놓고 시리아 총독으로 떠나야 했다. 무스타파 파샤의 공석에는 공성 기술자였던 아메드 파샤가 임명되었다.
투르크 군은 전술을 바꾸었다. 총공격의 날 이전처럼 포격과 지뢰를 대량으로 퍼부을 뿐, 직접적인 공격은 해오지 않았다.

아무 성과 없는 싸움이 계속 되었다. 투르크 군의 포격에 기사단의 주요 성채들이 점점 파괴되어갔다. 기사단은 무너져가는 성벽 뒤에 임시 성벽을 만들고 참호를 파가며 대항했다. 기사단장 릴라당은 늘 기사단의 선두에 있었다. 삼십사 일 동안 잠잘 때조차 갑옷을 벗지 않고 적의 공격에 대비한 적도 있었다.
서로의 체력과 무기와 병사를 소진시킬 뿐, 전황은 한 치도 바뀌는 게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날씨는 점점 더 싸늘해지고 있었다. 6월에 시작된 전투는 어느덧 다섯 달 째. 11월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11월 29일, 또 한 번의 ‘총공격’이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양측 모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기사단 측은 이미 그들의 자원을 거의 소진한 상태인데다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투르크 군은 투르크 군 대로, 그 동안의 전투로 사상자가 누적 된데다 캠프에 돌림병마저 돌고 있었다.
그날 밤, 술탄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로도스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항복한다면 주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장하겠다. 끝까지 저항한다면 모두 죽이겠다… 이미 기사단의 패색이 짙어진 것처럼 보이던 시기인지라 로도스 주민들은 기사단이 이 항복권고를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12월 9일, 기사단 회의에서 화평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단 한 명, 기사단장의 비서관인 장 파리소 드 라 발렛을 제외한 모두가 화평 교섭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12월 11일부터 기사단과 투르크는 교섭에 들어갔다.
슐레이만은 기사단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만약 명예롭게 항복한다면, 기사단이 그들의 모든 성유물, 기록, 군기와 대포를 비롯한 무기들을 기사단 소유의 전투함에 실어서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이며, 만약 필요하다면 투르크의 함선을 운반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제안 한 것이다. 로도스 주민들에 대해서도 향후 3년간 로도스를 떠나기를 원한다면 언제든 자유로이 떠날 수 있을 것을 보장하고, 또 향후 5년간 조세와 군역을 면제해 줄 것이며, 종교의 자유를 전적으로 보장하겠다는 등의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로도스 주민들은 이런 후한 조건에 만족해 항복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했지만, 기사단장 릴라당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12월 16일, 휴전 기간이 끝나자 투르크 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기사단 역시 평화교섭에 대한 것은 잊어버린 듯 응전했다. 이날부터 다시 격렬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12월 17일에는 마침내 에스파냐 성채가 함락되었다. 그 외의 성채들도 그 동안 계속된 전투로 이미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로도스 섬 주민들도 예전처럼 기사단에 협력하지 않았다. 기사단은 오기로 버티고 있었지만, 도시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12월 20일 밤, 릴라당은 마르티넨고에게 현재의 방어 상태를 물었다. 마르니텐고의 대답을 들은 릴라당은 깊이 고뇌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사단장은 술탄이 제시했던 조건에 따라 항복하겠다고 투르크 측에 알렸다. 슐레이만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2월 26일, 기사단장 릴라당과 슐레이만의 회견이 있었다. 기사단장 이하 열여덟 명의 기사들은 퍼레이드를 하는 것과도 같은 화려한 정복 차림으로 투르크 군 진영을 방문했다. 이것은 기사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기사단장 릴라당은 황제가 자비를 베푼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회담이 끝난 후, 슐레이만은 그의 친구이자 무스타파 파샤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된 이브라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렇게 용감하고 훌륭한 노인을 거처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건 정말 서글픈 일이야.”

이 시점에서 오스만 투르크 측의 사상자는 6만여.
성 요한 기사단 측에 남은 전력이라고는 기사 180여명에 병사가 1천 5백여, 남은 탄환은 고작 일주일 치도 되지 않았다.





1523년 1월 1일.
생존한 기사들은 완전 무장하고 당당하게 군기를 나부끼며 로도스 성벽 주위를 한 바퀴 행진했다. 그리고 그들을 크레타로 실어다 줄 배에 승선했다. 수천의 시민들이 이들과 함께 섬을 떠났다.

이렇게 슐레이만은 “그리스도의 뱀둥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동지중해의 제해권은 확고하게 오스만 투르크의 것이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카이로-레반트 간의 해상교역은 더욱더 활발해 질 것이었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일단 베네치아의 영토인 크레타로 갔으나, 이내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이후 시칠리, 니스, 제노바 등 이곳저곳 전전했으나 어디 한 군데 뿌리내리도록 허락해 주는 곳이 없었다. 유럽의 군주들에게 십자군이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매년 매 한 마리를 조공으로 바친다는 조건으로 성 요한 기사단에게 몰타 섬을 제공했다. 서지중해에서 활약하는 이슬람 해적들을 견제도 할 겸, 그래도 아직은 사람들사이에 큰 영향력을 가진 교황권에 생색도 좀 낼 겸 해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기사단은 다소 진통을 겪긴 했으나 몰타 섬에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534년, 기사단장 릴라당은 기사단이 새로운 영토에 뿌리내리는 것을 보며 숨을 거두었다. 이후의 기사단장들은 몰타 섬을 요새화 하는 일에 전력으로 매진했다.

1557년, 로도스 전투 당시 마지막까지 항복을 거부했던 기사,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렛이 가슴 속에 27년 전의 굴욕을 그대로 품은 채 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8년 후인 1565년, 마침내 성 요한 기사단의 마지막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 몰타섬 공방전으로 이어집니다. 아마도.

덧글

  • Mr술탄-샤™ 2008/03/18 12:23 # 답글

    과연 기사들의 전투력이 엄청납니다. 투르크군이 갑옷을 잘 입지 않는 풍속 때문에 피해가 막심했다는데, 이슬람 풀 슈트를 갖추었더라도 역시 기사단의 비교우위가 명확했을 것 같습니다.
  • Reuentahl 2008/03/18 13:45 # 답글

    와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마지막이 좀 쓸쓸하네요 그런 기사들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니..
    결국 매 한마리로 합의보고.-_-;
  • StarLArk 2008/05/26 10:31 # 답글

    하지만 하는 짓은 고작해야 신의 이름을 내세운 해상 노략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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